1916년 전라남도 영광군의 한 시골마을에서 26세의 청년 소태산이 인류구원의 목표 아래 새로운 종교인 원불교를 창시하면서 내걸었던 표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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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척사업의 과정은 주경야독을 통하여 소태산의 포부와 경륜을 제자들에게 교육하는 과정이었으며 원불교 교단의 조직화 과정이었다. 간척사업이 완공될 무렵, 전국은 3·1운동의 독립만세 시위로 들끓었고 만세시위는 영광읍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소태산은 이 와중에 아홉제자들에게 길룡리 주변의 산봉우리에 각각의 방위를 정해주고 인류의 정신개벽과 구원을 위한 기도를 하도록 명하여 血印의 이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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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태산의 이 같은 출발은 3년 만에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영광경찰서에 소환되어 1주일 동안이나 저축조합과 간척공사의 자금출처 등에 관한 조사를 받은 후 돌연 전북 부안 내변산의 실상사 인근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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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각지로부터 찾아오는 사람들을 귀의시키면서 새로운 교단 조직의 필요성과 그 장소를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1924년 봄, 소태산은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용리(현 익산시 신용동)에 3천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불법연구회는 조선총독부의 소위 문화정치라는 슬로건 아래 정치단체를 제외한 사회단체 의 활동을 허용한 유화국면을 이용하여 종교단체로 등록함으로써 종교활동을 합법적으로 보장받고자 한 것이었다. 소태산과 불법연구회는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불법연구회의 모든 활동은 상주하는 경찰관 3인에 의하여 감시를 받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총독부 관리들이 불시에 방문하여 회계서류를 감사하는 등의 수모를 겪어야 했으나 이들에게 빌미를 줄만한 일은 없었다. 이 시기 <회보>에 게재되는 모든 글들은 인쇄 되기 전에 검열을 받아야 했고 심지어는 문장표현 하나하나를 문제 삼아 삭제나 정간이 되기도 하고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글을 강제로 실어야 했으며 결국 1940년에는 강제 폐간의 수난을 겪었다. 또한 1943년 소태산의 열반 이후에는 불법연구회의 황도불교화를 강제하였으나 이를 미루어 오던 중 일본의 패전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해방 후 교명을 원불교로 바꾼 교단은 분단체제 하에서 교단 내부적인 역량 강화에 주안점을 두고 교단의 3대 목표인 교화, 교육, 복지사업에 역량을 집결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해방 후 원 불교 활동의 특징은 교역자 양성을 위한 대학교육 기관의 설립, 원불교 교리에 바탕 한 국내외 종교 간의 대화와 교류사업의 추진, 다양한 복지사업 시설의 운영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WON BUDDHISM
창립과 발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